궁궐보다 더 권세를 떨치던 운현궁
궁궐보다 더 권세를 떨치던 운현궁
낙원동 허리우드실버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지하철을 타려고 안국역으로 올라 가다가 운현궁에 빨려 들어갔다.
운현궁!
흥선대원군! 우리나라의 근대사에 커다란 획을 그린 역사적 주택으로, 궁궐은 아니었으나 궁궐보다 더 큰 위세를 누렸던 집이다. 흥선대원군의 사저로 고종이 출생하고 자란
곳으로 조선시대 5대궁 외에 궁(宮)이란 이름을 붙인 곳은 여기뿐이다.
권모술수의 대가이며 권력에 대한 끝 없는 야망, 이래서 굴욕, 무소불위의 권력, 며느리와의 대암투 끝에 다시 맞이하는 굴욕, 3일에 그친 권력의 탈환, 멀리 청나라에 압송되어 돼지나 키우던 노후, 다시 막후 정치실세로의 역활 등 권력과 굴욕을 거듭하던 그의 일생은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을 통하여 널리 알려져 있다.
고종은 후사가 없던 철종의 뒤를 이어 조선의 26대 왕이 되는데 그때 나이가 12세였다. 어린 고종을 대신해 흥선대원군이 조선을 다스리게 되니 이 집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만했다고 한다.
고종이 즉위하면서 ‘궁’이라는
이름을 받은 이곳은 점점 그 규모를 늘려가는데 담장의 둘레만도 수 리에 달했다고 하며, 고종이 머물던 창덕궁과의 왕래를 쉬이 하기 위해 운현궁과 이어지는 흥선대원군의 전용문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 규모와 위세를
짐작할 수 있겠다.
노안당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자를 집자해서 만들었다 하며, 처마를 이중으로 두르고 있는 보첨도 이 건물의 볼거리이다. 옆으로 이어지는 노락당(老樂堂)은 운현궁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데 고종이 명성황후 민씨와 가례를 올린 곳이 바로 여기다.
가운데 중정이라는 ‘ㅁ’자형의 작은 마당이 마루로 둘러싸여 있는데 안채가 가지는 성격에 따른 폐쇄적인 특성을 반영하는 구조라 할 수 있겠다.
이로당을 나서면 앞으로 작은 기념관이 있어 흥선대원군이 주장했던 쇄국정책을 알리는 척화비와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 등을 모형으로 볼 수 있다. 운현궁 북쪽에 있는 <영안당>은 이재면의 주치의였던 내과의사에게 헐 값으로 매각했는데 그 터에서 국내 최고의 로펌인 '김&장'의 대표변호사 김영무와 그 동생인 세계적인 바이올리스트 김영욱을 배출했으니 명당중 명당인가 보다. 도저히 왕이 될 수 없는 서열의 고종이 임금이 되었으니 말이다. 이래서 이 곳에서 전통결혼식을 올려 기를 받으려는 것일까?
淸閑 執筆室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