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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畵 鑑賞

최 낙출 2016. 11. 20. 15:02



 

 

 

名畵 鑑賞

 

Pieter Bruegel (네덜란드)

(1528 - 1569)

피터르 브뤼헐은 브라반트 공국의 화가이다.

북유럽 르네상스의 대표적 화가인 그는 태어난 마을 이름을 따 성을 삼았다.

1551년 앤트워프의 화가 조합에 들어간 후, 이탈리아·프랑스에서 유학하였다.

처음에는 '민간 전설'이라는 속담 등을 주제로 하여 그림을 그렸고,

후에 네덜란드에 대한 에스파냐의 억압을 종교적 제재로써

극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이어서 농민 생활을 애정과 유머를 담아서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므로 '농민의 브뤼겔'이라고 불리었다.

 

바벨탑

 

 

 

 

 

 

 

 

 

불구자들

 

결혼식축하연

 

농민들의 결혼축하댄스

 

 

 

 

Mary  Cassatt  (미국)

(1844 - 1926)

메리카사트는 1884년 미국 펜실바니아주 엘러게이니시에서

태어났으나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한 여류화가이다.

그녀는 우연히 드가의 작품을보고 인상파에 발을들인다.

그녀는 상류사회에서 생애의 절반을 생활했으나

작품은 주로 어머니와 아들을 중심으로하는 중류가정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몇몇 작품들이 마네와 르누아르의 그림을 연상시키면서

전반적으로 여류 인상주의화가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노년기, 병에 걸려 장님이 될 정도의 건강 악화에도 그녀는

예술에 대한 열정과 감사를 접지 않았다.

메리 카사트는 그림을 그릴 때 모델보다는

실제 모녀사이를 주로 그렸다.

그렇기에 그림 속 모녀의 관계가 더 따뜻한 감동을 주고있다

 

 

 

 

 

 

Breakfast In Bed

 

 

 

Driving (1881년)

 

 

 

 

 

Young Mother (1900년)

 

젖 먹는 아이와 엄마 (1898년)

카사트는 모성애나 엄마와 아이의 친밀한 관계를 주로 그린

화가이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도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애정이 확연하게 느껴진다.

아이는 어머니에게 완전히 의존하고 있으며

배경을 따뜻한 색으로 칠함으로써 안정감 있는 분위기가 연출된다

인간에게 있어서 모성이란 어린 시절을 추억하게 하는 향수이며

제대로 된 성인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필수적인 애정이다.

 

 

 

 

 

어머니와 두아이(1905년)

목욕 (1893년)

 

 

 

The Caress (1901년)

 

 

 

Woman in a Loge

 

 

 

 

 

 

 

해변의 아이들

 

Paul Cezanne (프랑스)

(1839 - 1906)

사과 하나로 파리를 정복하겠다.’는 세잔의 말처럼 그에게 사과는

과일을 그렸다기보다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평범한 과일을 통해 그가 찾았던 것은 화가로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이다.

그에게 사과는 성취할 수 있는 도구였던 것이다.

상징주의 화가 모리스 드니는 ‘역사상 유명한 사과가 셋 있는데, 첫째가 이브의 사과이고,

둘째가 뉴턴의 사과이며, 셋째가 세잔의 사과이다’라고 했을 정도로

미술역사상 세잔의 사과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세잔의 가장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 사과를 그린 정물화다.

 

 

 

 

 

 

 

 

 

 

 

 

 

 

 

 

 

 

 

 

 

 

 

 

 


  2016/11/11 09:19:18

 

 

名 畵 鑑 賞 (7)

 

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미켈란젤로  부오나루티 - 이태리

( 1475 - 1564 )

이탈리아의 조각가, 건축가, 화가,시인인 미켈란젤로는

1475년 피렌체 근교 카프레제에서 출생하여 14세때부터

메디치 가문의 보호를 받으며 베도나텔로 작풍을 배웠다.

바티칸의 산피에트로 대성당에 있는 피에타

프랑스 추기경의 의뢰로 완성한 것은 1499년경이다.

새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시스티나성당의 안쪽 벽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고 다음 해부터 혼자 착수,

고생 끝에 6년 후인 1541년에 《최후의 심판 》을 완성하였다

1547년에는 산 피에트로대성당의 조영 주임이 되어

1557년 대원개(大圓蓋)의 목제 모델을 완성하였다.

, 고향 피렌체에 대한 향수에 젖으면서, 병을 얻어  

1564년 89세의 오랜 예술적 생애를 마쳤다.

메디치가()나 교황에 봉사를 끝없이 요구당하면서도

언제나 자유와 정의를 추구하여 싸운 그의 괴로운 심경은

남겨진 편지와 시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예술이 모두 이와 같은 인생의 고뇌와 사회의

부정과 대결한 것은

그의 초인적인 억센 제작력에 의해 달성된 것이다.

 

최후의 심판 (1534~1541년)

최후의 심판

1533년 클레멘스 7세로부터 최후의심판 그림을 그릴 것을 명받았다.

미켈란젤로는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라는 인류의

시작과 끝을 모두 그려낸 예술가이다.

신약성경의 요한게시록을 근거로 상상하여 그렸다고 한다.

미켈란젤로가 처음 최후의 심판을 그렸을 때에는 모두 발가벗은

몸이었으나 교황의 눈에는 성당의 그림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거금을 주고 다른 화가를 고용하여 옷을 입히게 하였다.

결국, 덧칠을 한 셈이다. 이 벽화에는 391명의 인물이 그려졌다.

벽화에 중앙에 있는 예수는 오른손을 들어 심판을 나타내고

왼손은 손짓하여 사람을 부르는 듯하다.

오른쪽 가장 아래에 뱀이 감고 있는 남자는 교황의 의전을 담당하는

자를 그려 넣은 것인데  미켈란젤로의 미움을 받아서

제일 안 좋은 역할의 모델이 되어버린 셈이다.

 

 

 

 

 

 

 

 

 

 

 

 

 

 

 

 

 

 

 

 

 

 

 

 

 

천지창조

시에스타 예배당 천장에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작품이 있는데. 혼자 4년간 이 천장화를 그렸다.

그가 그린 3백 장의 예비 드로잉은 밑그림으로 그려져서

천장으로 옮겨졌는데배경의 세부 묘사 보다는

인물의 움직임에 초점을 맞춰서 그려졌다.

중심 패널에는 천지창조부터 노아의 방주까지 창

세기에 나오는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교황청에서 이 그림을 복원하고 유지하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갔을 시점에 판권을 일본에게 넘겼다고 한다.

 

 

 

 

 

 

 

 

 

 

 

 

 

피에타

미켈란젤로의 초기 작품이며, 동시에 르네상스 전성기의 대표작이다

피에타란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 라는 뜻으로,

성모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있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을 말하는데 이 피에타상은 미켈란젤로가

로마에 머물던 시절인 25세때 추기경의주문에 의하여 제작되었다

피에타상은 피렌체에 있는 다비드. 로마 산피에트로대

성당에 있는 모세상과 더불어 그의 3대 작품으로 꼽히는데,

그 중에서도 완성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다비드

다비드는 미켈란젤로가 1506년에 조각한 대리석상으로,

이스라엘의 왕 다윗의 청년의 모습을 예술적으로 표현한것이다.

미켈란젤로는 1501년피렌체에서 시청의 부탁으로

다비드를 3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모세상(1516년)

「모세상」은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묘지를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각 작품으로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 소장되어 있다

미켈란젤로의 모세상을 볼 수 있는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은

성 베드로를 묶었던 쇠사슬을 보관한 성당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