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의 유래
추석의 유래 추석이 언제부터 행해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중국·신라시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한'이란 '크다'라는 뜻이고
'가위'란 '가운데'를 나타내는데, '가위'란 신라 시대 때 여인들이 실을 짜던 길쌈을 '가배(嘉排)'라 부르다가 이 말이 변해서 된 것이다.
추석의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신라의 제3대 왕 유리 이사금 때 벌인 적마경기(績麻競技)에서 비롯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가 기술되어 있다.
嘉俳의 당시 발음이 ‘가배’와 얼마나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로부터 중세 한국어의 ‘ᄀᆞᄇᆡ’와 지금의 ‘(한)가위’라는 이름이 온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의견은 대략 10월경에 벌어지는
동명제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이다. 한편, 일본의 역사책 《일본서기》에 따르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해서 기념한 날을 승전기념일로 기념하여 즐겁게 보낸다고 한다. 풍습추석에는 추석빔을 입고 햅쌀로 빚은 송편과 여러 가지 햇과일·토란국 등 음식들을 장만하여 추수를 감사하는 차례를 지낸다. 또한 맛있는 음식을 이웃과 다정하게 나누어 먹으며 즐거운 하루
를 보낸다. 아무리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사람도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즐겁게 보냈으므로 "1년 열두 달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도 생겨났다. 온갖 곡식이 무르
익는 결실의 계절로서, 가장 밝은 달밤이 들어 있으며, 조상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으로 성묘를 드린다. 성묘 때 잡초를 베는 것을 '벌초(伐草)'라고 하는데, 벌초는 성묘 하루 전에 하기도 한다.
추석 때는 여러 가지 행사가 펼쳐지며 놀이가 벌어진다. 소싸움·길쌈·강강술래·달맞이 등을 한다. 농악을 즐기는가 하면 마을 주민들끼리 편을 가르거나 다른 마을과 줄다리기를 한다. 잔디밭이나
모래밭에서는 씨름판이 벌어지는데, 이긴 사람은 장사(壯士)라 하여 송아지·쌀·광목 등을 준다. 전라남도 서해안 지방에서는 추석날 달이 뜰 무렵 부녀자들이 공터에 모여 강강술래를 하였으며,
닭싸움·소싸움도 즐겼다고 한다. 추석은 추수기를 맞이하여 풍년을 축하하고, 조상의 은덕을 기리며 제사를 지내고, 이웃과 더불어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한국 최대의 명절이다. [1] 추석 제사의 종교별 의미와 풍속도유교유교의 핵심은 인간행위의 기본이자 모든 덕의 으뜸으로 삼고 있는 ‘효’ 사상이다. 유교에서 말하는 효의 근본정신은 가장 귀한 생명을 조건 없이 주고 극진한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준 부모와 선조에 감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효는 부모 생시뿐 아니라 사후에도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를 통해 “죽은 이 섬기기를 살아계실 때 섬기듯이 함(중용 19장)”이라는 정신으로 이어진다.
유교에서는 이렇듯 조상에게 지극정성으로 드리는 제사를 통해 “신령(神靈)이 흠향(歆饗; 기쁘게 받음)하게 되며 강복(降福; 하늘에서 복을 내리는 일)도 따르게 된다” 고 믿는다.
유교 조상제사에는 사당제(祠堂祭), 이제(爾祭), 기제(忌祭) 등이 있는데 형식상 다소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4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첫째 부분은 마음을 집중시키고 신령의 임재(臨齋)를 준비하는 단계로 제사 전 마음을 모으는 제계(祭戒), 음식을 차려놓는 진설(陳設), 신령이 임재하게 하는 강신(降神) 등이 있다.
둘째 부분에선 효성의 상징적 표현인 제물을 드리면서 흠향을 간청한다. 여기에는 생시와 같이 정성스럽게 음식을 올리는 진찬(進饌)과 술을 바치는 헌작(獻爵) 등이 있다.
셋째 부분은 신령이 제사를 흠향하고 강복하는 의식이다. 신령이 흠향하도록 문을 닫는 합문(闔門)과 다시 들어가서 차나 숭늉을 드리는 헌다(獻茶)와
제물의 일부를 제주(祭主)에게 먹도록 하는 수작(受昨), 신령의 흠향이 끝났음을 알리는 이성(利成) 등이 있다.
마지막 넷째 부분은 신령에 드리는 의식을 끝내는 마무리 의식으로 작별인사를 올리는 사신(辭神)과 서로 축복하면서 제물을 나누어먹는 음복(飮福) 등이 있다.
유교의 모든 제사의식은 자손들이 죽은 이를 생시와 같이 정성껏 섬기려는 효성의 상징적 표현이며, 신령이 감사의 제사를 흠향하게 되면 하늘에서
자손들에게 복을 내려준다. 아울러 신령한 복을 받은 후손의 자세는 “그 복을 독점하지 않고 친척‧
이웃과 나누며 더 나아가 삶 자체를 향기로운 제물이 되게 함으로써 신령에 화답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불교추석 차례는 유교 뿐 아니라 불교 의식에도 뿌리를 두고 있다. 《백장청규(百丈淸規)》라는 책에는 차례의 뜻을 ‘한 솥에 끓인 차(茶)를 부처님께 바치고 또 공양드리는 사람이 더불어 마심으로써
부처와 중생이 하나가 되고 또 절 안의 스님과 신자가 같은 솥에 끓인 차를 나누어 마시면서 이질 요소를 동질화시키는 일심동체 원융회통의 의례가 차례’라고 설명해 두고 있다.
불교식 명절 제사법의 전문가인 태고종 열린선원의 승려 법현은 “차례(茶禮)는 하늘과 조상에 차(茶)를 올리면서 드리는 예(豫)”라고 강조한다. 법현은 “신라 경덕왕 시절 충담스님이 부처님께 차를 올렸다는 기록을
비롯해 조상님 사당에 며느리가 차를 올리도록 한 고묘(告廟) 등 역사적 근거가 분명히 존재한다.”라면서 “특히 조선시대 유학자이자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중된 한재 이목 선생 집안에서도 차를 올렸다는
기록과 그 후손들은 현재 숭늉 대신 차를 올려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불교식 가정제사 기본 지침에 따르면 차례 상차림은 간소함을 원칙으로 하고
고기·생선류는 제외한다. 육법공양물에 해당하는 향·초·꽃·차·과실·밥을 올리고 국·3색나물·3색 과실을 갖춘다. 불교 제사는 꽃을 갖춤으로써 육법공양물을 완성하는 의미가 있다.
불교에서 소개하는 가정제사 절차를 살펴보면 영가 모시기-부처님과 영가 (靈駕, 조상 영혼) 모심, 제수 권하기, 불전 전하기(경전 또는 게송 독송), 축원(문) 올리기, 영가에게 편지 올리기(생략 무방), 영가 보내기, 제수
나누기로 제사를 마치고 나면 가족이 둘러앉아 음복(飮福)하며 조상을 기리고 서로 덕담을 나눈다.
불교식 축원문에는 조상의 살아생전의 삶을 간략히 되새기고 자손들의 화합과 모든 중생의 성불, 하루속히 부처의 나라가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 등이 담긴다. 천주교과거에 천주교는 죽은 이 앞에서 절을 하고 그들을 섬기는 조상 제사를 미신 행위로 여겨서 제사 금지령을 내린 적이 있다. 이러한 조상 제사문제는
과거에 천주교를 박해하는 결정적인 원인 중에 하나가 되기도 했고 선교의 가장 큰 걸림돌이기도 했다.
선조들을 공경하는 민족적 풍습인 제사가 과연 교리에 어긋나는가라는 의문이 일어나자 교황 비오 12세는 1939년 “제사 의식은 그 나라 민속일 뿐, 교리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라는 훈령을 내려 제사에 관한 교리를 정리했다.
이 때부터 천주교는 제사를 조상에 대한 효성과 존경을 표현하는 민속적 예식으로 인식하고 제사를 허용하고 있다. 다만 제사 절차상 조상에 대한 효심이 지나쳐 미신적인 요소로 변질된 부분이라든지, 하느님만을 섬기는
천주교의 교리에 걸맞지 않게 생각되는 행위는 금지된다. 천주교의 명절 미사는 가톨릭 전례와 한국인의 전통 제례가 융합된 모습을 보여준다. 설이나 한가위 등의 명절에는 본당 공동체가 미사 전이나
후에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조상에게 대한 효성과 추모의 공동 의식을 거행함이 바람직하다고 가르친다.
천주교는 명절이나 탈상, 기일 등 특별한 날에는 가정의 제례보다는 위령미사를 우선해 봉헌하도록 하고 있다.
2003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펴낸 《상장 예식》에 따르면 차례상에는 촛불 두 개와 꽃을 꽂아 놓으며 향을 피워도 된다. 벽에는 십자고상을 걸고
그 밑에 조상의 사진을 모신다. 사진이 없으면 이름을 정성스럽게 써 붙인다. 다만 위패에 신위(神位)라는 글자를 적어서는 안된다. 이어 성호를 긋고 성가를 부르고 성경 구절을 선택해 봉독하기, 가장의 말씀, 부모·자녀·가정·
부부를 위한 기도 등을 거쳐 차례 음식을 음복하고 성호를 긋는 것으로 차례를 마친다.[2] 또한, 한국 천주교는 설과 한가위를 이동 축일로 제정, 고유 독서와 고유 감사송을 곁들인 명절미사로 거행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
천지신명에게 고하는 축문(祝文), 영혼이 제물을 받도록 병풍을 가리고 문밖에 나가는 합문(闔門), 상집에서 죽은 이의 혼을 부를 때 저승에서 온 사자를 먹인다는 사자(使者)밥을 차리는 것 등은 천주교에서 미신으로 규정하고 금지하는 사항이다. 북한북한에서도 대한민국과 마찬가지로 추석을 명절로 지정하고 이날 연휴를 보내고 성묘에 가지만 북한의 민족 최대 명절인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일 만큼 의미를 두진 않는다.
북한은 1967년 5월, 봉건 잔재를 일소하라는 김일성 주석의 지시에 따라 음력설을 비롯한 민속명절을 공식 금지했으나 1972년 남북대화가 시작된 이후 추석에 한해 성묘 등을 부분적으로 허용했다.
이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조선민족제일주의 주창에 의해 1988년 추석을 시작으로 음력설, 단오 등을 민속명절로 부활, 휴일로 지정했으며 2003년부터 양력설 대신 음력설을 기본 설 명절로 쇠게 하고 공휴일로 지정했다.
일반 주민들은 집에서 따로 차례를 지내지 않고 차례 음식을 준비해 성묘를 간다. 경제적 형편이 나은 집들은 송편이나 흰 떡 등을 장만해 성묘를 가지만 사정이 어려운 일반 서민들은 술과 나물, 간단한 음식을 장만해 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식량난이 악화돼 이마저도 준비하지 못하는 집들이 많다고 한다. 북한은 신정(1월 1일), 김일성·김정일 부자 생일, 국제노동자절, 정권 창건일,
당 창건기념일 등을 국가명절로 하고 설날(음력 1월 1일)과 추석, 단오 등은 민족 명절로 구분해 지낸다.
국가 명절은 국가차원의 특별 공급이 있지만 민족 명절은 특별 공급이 없어 서민들의 추석 보내기는 더욱 힘들다.
하지만 간부들의 추석은 일반 주민들의 추석보다 여유롭다. 간부마다 차이는 있지만 특별 공급은 없어도 상대적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어 제수 물자 확보에 큰 어려움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추석 때 준비한 음식의 질과 양이 간부들의 세를 과시하는 용도로 활용되기도 한다. 추석 음식상의 풍요로움은 남북간 차이가 크지만 여성들이 부엌에서 일을
하고 남성들은 친척 등 손님과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세태는 여전하다. 추석날 민속놀이로는 씨름대회나 농악 등이 곳곳에서 진행되지만 주로 기관과 단체에 의해 조직된 행사로 자발적 참여율은 높지 않다.[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