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지막 여덟 번째는 황진이가 정말로 사랑한 사람은
바로 서경덕인데요,
황진이는 서경덕의 학문이 높음을 듣고
서경덕에게 가서 유혹하였으나
넘어오질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을 써보고 함께 오랜 시절을 지냈으나
서경덕은 의연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황진이가 감탄하여
"지족선사는 30년 면벽수련에도 내 앞에 무릎을 꿇었는데
서경덕은 함께 오랜 시절을 지냈으나 끝까지
나에게 이르지 않았으니
진정 성인이다."라고 말하고 서경덕에게 제자로
받아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제자가 돼었고 '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 이 세사람을
송도삼절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황진이는 남성위주의 시대를 외려 휘저었고
섹스는 언제나 본인이 선택하고
선도했으나 헤프지 않았으며 시화에 능하고 풍류를 알아
서양 및 중국의 미녀가 단순히 미모로
권력자에게 몸을 맡기고 이름을 날린 것과는
차원이 다른 女人이었습니다.
그래서 후일의 남자들도 그녀를 그리워하며 "자는가?
누웠는가?"라고 그녀를 흠모하였답니다.

본명은 황진(黃眞, 1511~1551), 기명(妓名)은 명월(明月)
그녀가 남긴 시조가 한국 문학사에 커다란 족적이 될 정도로 뛰어났던,
조선 중종 때의 시인이자 시대를 풍미한 명기(名妓)이며,
화담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 삼절로 불리었다.
송도(개성)의 양반 황진사의 서녀로 태어나 우여곡절 끝에 기생이 되었다.
타고난 절색에 명창이었으며 시재(詩才)에도 능해 당대 최고의 명기로
여러가지 일화를 남겼다.

그녀를 사모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은 마을 청년의 상여가
집 앞에 멈추어 움직이지 않은
벽계수를 유혹하여 말에서 떨어지게 한 일.
30년 면벽의 지족선사를 유혹하여 파계 시킴.
화담 서경덕 선생을 유혹하려다 실패하고
감복하여 제자가 된 일.

이처럼 학자, 문인 등 일류 명사들과도 많은 교류를 하였는데
그와 교류한 인물로는, 30년 면벽수련으로 유명한
지족선사(萬錫禪師), 대학자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종실(宗室) 벽계수(碧溪水), 판서(判書) 소세양(蘇世讓),
선전관(宣傳官) 이사종(李士宗),
재상의 아들 이생(李生) 등이 있으며 남사당패와도
오래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주요 작품으로는 <만월대 회고(滿月臺懷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