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무주군 덕유산(해발1614m)칠연(七淵)계곡/ 박용목 김담구 박준민 권영수
권영수 목사내외가 이곳 칠연계곡 입구에 작은 집을 짓고 텃밭을 가꾸면서
자연과 더불어 재미있게 살고 있단다. 예고도 없이 내려가면서 전화를
했고, 무주IC 만남의
무주구천동 계곡 무주구천동 계곡 입구에 있는 나제통문(羅濟通門) 신라와 백제로 오가는 관문이라 한다
홍명희 생가
홍명희1888, 5, 23 - 1968, 3, 5) 충북 괴산출생>
1928년 조선일보에 '임꺽정' 연재1945년 월북
1948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북한 내각 부수상
1967 북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1958 북한 IOC 위원
호는 가인(可人)·벽초(碧初). 어린 시절에 한학을 수학하다가 일본에 유학하여
다이세이중학(大成中學)을 졸업하였다.
생애 경술국치 직후 귀국하여 오산학교(五山學校), 휘문학교(徽文學校) 에서
교편생활, 1920년대 초반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1927년에 민족 단일 조직인 신간회(新幹會)의 창립에 관여하여 그 부회장으로 사회
운동에 참여 1930년 신간회 주최 제1차 민중대회사건의 주모자로 잡혀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 직후에는 좌익운동에 가담하고,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이
되기도 하였으나,
곧 바로 월북하여 북한 공산당정권 수립을 도우면서 부수상 등 요직을 맡았다.
홍명희 생가
우측 비석은 홍명희 父
홍범식(洪範植)의 공적비다
홍범식/1871∼1910.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방(聖訪), 호는 일완
(一阮). 충청북도 괴산 출생. 참판(參判)홍승목(承穆)의
아들이다. 1888년(고종 25) 진사가 되었으며 1902년 내부주사
(內部主事)·혜민서참서(惠民署參書)를 역임하였고 1907년 전라북도
태인군수에 부임하였다. 1909년 금산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당시 일제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이 전국에서 봉기하여 치열한
항일전투를 전개하고 있던 때로서 적극적으로 의병 보호에
힘써 일본군의 체포망을 피하게 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주권이 강탈되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목매어 자결하였다. 그가 남긴 유서 5통은
일본경찰이 압수함으로써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홍명희 생가 안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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